우리나라의 기본적인 법제도의 골격은 일제를 통해 간접 계수한 18, 19세기의 대륙법계에 기초한다. 이법제들은 서양의 근대 시민사회에서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기획을 추구했다. 그러나 한 개인의 자유는 다른 개인의 자유와 충돌하기 때문에 법은 모든 개인들이 공평하게 자유를 누리도록 보장하여야 한다. 이런 임무를 맡는 법은 첫째, 마음껏 자유를 누리는 개인상을 전제한다. 자본주의 체제의 성장과 함께 그런 개인의 자유는 소유를 향해 있다. 여기서 소유의 개념은 재산뿐만 아니라 개인의 생명과 자유를 포함한다. 그렇기에 자유주의적 법 모델이 전제하는 시민상을 소유적 개인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근대법을 계수한 한국사회에서 어림잡아 1980년대까지 이런 인간상은 결코 보편적이지 않았으나 지금의 한국사회의 시민상은 소유적 개인주의로 특징지어도 크게 틀리지 않을 듯하다. 하지만 법이 전제하는 인간상이 소유를 향해 이기적이고 전략적으로만 행동하는 개인이라면, 그런 개인들이 모여 사는 사회의 질서 형성은 필경 아담 스미스가 말한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과 같은 기독교적 성격의 신비주의적인 기제에 내맡겨지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손이 시장에서조차 조화를 달성하기 어려운 것처럼, 소유적 개인주의에 물든 개인들이 질서가 잘 잡힌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이런 점에서 근대법, 즉 자유주의적 법체계를 개인주의적 자본주의적 상품 생산체계 및 시장질서와 등식화 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자유주의적 법 모델은 시민사회에서 소유적 이기주의에 대하여 비판적 거리를 둘 수 있는 도덕적 성찰 능력이 있는 시민상을 전제하게 된다. 하지만 자유주의적 법 모델이 전제하는 시민상으로서 소유적 개인상 자체를 전적으로 폐기하는 것은 자칫 자유 보장의 기획을 망가뜨릴 수도 있음을 항상 유의하여야 한다. 근대법은 소유적 개인주의에서 출발하지만 이성을 지닌 또는 이성의 실현을 도모하는 인간상을 지향한다. 즉 자유롭지만 다른 사람과 동등할 줄 알며, 자신의 결정과 행동에 책임을 지는 자유성을 지닌 존재, 판단능력과 행위능력을 갖춘 인격체로서 개인이 바로 자유주의 법 모델이 상성 하는 인간상이다. 이런 개인은 다른 개인과 자유를 공평하게 누리도록 자신의 자유로운 행동에 일정한 반경을 설정할 수 있다. 자유주의 법체계는 바로 그런 반경을 구체화하는 즉, 공평하게 자유를 누리기 위한 권리의 정교한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근대 시민사회의 법이 사람들에게 자유로운 행동의 반경만을 정해주는 것이었다면, 근대법은 성숙한 시민상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자유로운 행동의 반경 안에서 개인은 비록 사회 전체의 실질적인 복기를 위한 공동의 투자를 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의무를 부담하지 않지만 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행복관을 형성하고, 자기 책임 아래 자기 자신의 고유한 삶의 계획을 추구할 수 있고, 또한 그럴 역량이 있는 존재 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법체계에서 국가의 임무는 소극적이다. 즉 개인들이 다 같이 공평하게 자유를 누릴 수 있기 위해 지켜야 하는 자유로운 행동의 반경을 넘어서는 행동을 통제할 뿐이다. 바꿔 말해 국가는 개인의 자유의사 앞에 이미 주어져 있는 어떤 목표를 향하여 그 개인의 행동을 조종하는 그런 적극적인 임무를 부여받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근대법이 상정한 국가는 흔히 야경국가라고 한다. 다시 말해 국가는 시민사회의 조종센터가 되지 않는다. 국가에게 목표가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모든 개인들이 공평하게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각 개인들이 향유할 수 있는 권리와 부담 해야 하는 의무를 체계를 정교하게 짜는 일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소극적 역할의 국가상은 19세기 유럽의 역사에 일관되게 관철된 현실은 아니었다. 당시 벌어졌던 국가 간의 전쟁은 나름의 집단적 목표를 위해 사람과 자원을 동원한 것이고 이는 국가가 개인의 자유 보장이라는 기획을 넘어서 또는 그것과 무관하게 독자적인 행위주체의 성격을 띠는 집단으로 변환되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런 국가의 역사적 현실은 자유주의 법체계를 이념적으로 폭파해버리는 것은 아니었다. 자유의 공평한 보장이라는 기획을 더 철저하게 완성하려면 국가의 주권이 확고하게 지켜져야 하고, 그것을 위해서 때로는 전쟁도 수행할 필요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 자유의 공평한 보장이라는 소극적 임무의 완성을 위해 국가는 전쟁수행이라는 적극적 기능을 수행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여기서 임무가 국가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이념이라면, 기능은 국가의 정체성에 수반되는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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